사양/다자이 오사무/ 240p/소와다리

실제 내연녀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몰락 귀족의 비극
다자이 오사무의 역작 [사양]은 몰락한 귀족 여성의 삶을 그린 비극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어 하루아침에 모든 특권을 잃게 된 한 가족과, 몰락이라는 현실을 각자 다른 태도로 받아들이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꿋꿋한 의지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장녀 가즈코, 허무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동생 나오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무력한 어머니,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퇴폐 작가 우에하라. 커다란 변화 앞에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네 인물들은 서로의 삶에 조금씩 영향을 끼치면서 교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가즈코라는 여성의 독백과 편지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다자이는 각각의 등장인물에 자신이 살아오며 느낀 절망을 조금씩 투영한다. 약물에 중독되어 방황하는 나오지는 과거의 자신이며, 한없이 방탕한 작가 우에하라는 현재,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머지않아 폐결핵으로 죽어갈 미래의 자기 모습이다. 다만 자기에게 결여된 의지와 희망만큼은 가즈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실제 내연관계였던 오타 시즈코라는 여성과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그녀의 일기로부터 힌트를 얻어 쓰인 [사양]은 패전으로 인해 허무감와 박탈감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렬한 지지를 얻어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몰락한 귀족을 지칭하는 '사양족'이라는 말을 크게 유행시켰다. -interpark

 일본이 사랑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써낸 걸작 '사양'

일단 출판사의 이야기를 하자.

난 좋아하는 작가나 출판사의 신간을 확인하기 위해 한 달에 여러 번 인터넷서점을 돌며 검색해보는데, 

오랜만에 '소와다리' 출판사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출판한 걸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했다.

출판사 소와 다리는 매력적인 초판본 디자인과 작가 특유의 문체를 살려주는 번역, 높은 이해도, 본문의 시대상을 볼 수 있는 배경과 작가의 사진들을 첨부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멋스러움을 더해 소장하고 싶게끔 엮어주며 날 출판사의 팬으로 만들었다.

 

초판본 디자인의 붐으로 여러 대기업이 온갖 책들의 초판 디자인을 찍어내서 그 자체의 유니크함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소와 다리만의 매력은 퇴색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세로 쓰기를 포기했다는 점인데,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너무너무 아쉽지만 여러 독자들이 불만을 표해서 사라졌다고 하니 나로서는 눈물을 삼키고 납득하고 있다.

중요한 건 다수 독자들의 니즈를 따라 돈을 쓸어 담은 출판사의 존속과 번영이다. 그렇게 해서 여유가 생긴다면, 사양된 세로 쓰기도 나처럼 기다리는 독자를 위해 다시 한번 만들어줄지도 모르니까.

사양. 무언가를 거절할 때 쓰는 사양이 아니다. '斜陽' 즉 저무는 해를 뜻하는 '사양'이다.

패전 후 일본의 귀족이-나라 자체가 몰락하는 모습을 다자이는 사양으로 표현했다.
이 책의 주인공 겸 화자인 '가즈코'와 그녀의 가족인 '어머니' 남동생 '나오지'는 일본의 마지막 귀족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오지는 전쟁터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집을 가즈코와 어머니 두 명이서 지키고 있다.
가난 속에서 자신과 어머니의 물품을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결국은 숙부의 도움으로 고향집을 정리하고 시골 산장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타향의 낯선 생활과 변화에 처음에는 울적한 기분에 빠졌지만, 나쁘지 않은 풍경과 산장에 굳세게 살아가길 결심한다.
작업화를 신고 밭일을 하며 적응해서 살아간다.
그런 나날을 보내는 중 숙부의 소식으로 생존을 확인했던 남동생 나오지가 돌아왔지만, 나오지는 술과 마약에 빠져있었고, 소설가라고 하는 '우에하라'와 어울리며 더욱 신세를 망치고 피폐해져 갔다.

방탕한 남동생과 병마에 쓰러져 누운 어머니가 있는 낯선 땅에서 가즈코는 강하게 결심을 하게 된다.

가즈코의 모델 겸 영감을 준 일기주인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다자이의 걸작 '인간실격'을 읽고 '사양'을 읽는다면 그의 달라진 인상에 놀랄 것이다.

그저 파멸적이고 파탄 난 그의 인간상인 인간실격의 바로 전 작품인 사양에서는 사랑과 혁명을 위한 투쟁을 야기하고 희망을 쟁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 귀부인. 천진하기도 하며 품위 있는 어머니는 가즈코의 희망과 같았다. 

어머니가 죽고 가즈코가 야기하는 혁명은 사실 완벽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사랑인 건 알겠다. 그런데 왜 하필 우에하라?

그 천박해진 우에하라에게 무엇을 느꼈는지 왜 그렇게 집착하게 되는 건지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즈코가 생각하기에는 우에하라 역시 술로서 신세를 망치지만 그것이 우에하라의 혁명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사람에게는,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는 동시에, 언제든 마음대로 죽을 권리도 있지만, 하지만,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죽을 권리를 뒤로 미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어. 내 죽음은 동시에, '엄마'까지 죽이는 셈이 되니까.
 
한 번 더, 안녕히.
누나.
나는, 귀족입니다."

나오지의 유서에는 그간의 고뇌가 담겨있다. 귀족으로 태어나 민중 속에 섞여들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민중은 받아주지 않는다.

살 권리와 죽을 권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죽음으로 '엄마'를 죽이는 살인. 타인을, 가족을 죽이는 권리는 없다고 한다. 결국 엄마의 죽음 이후, 나오지는 그간의 속마음을 유서에 뱉어내고 귀족으로 자살하게 된다. 이 권리의 내용은 나오지가 전쟁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기요틴, 기요틴, 슈르슈르슈."

우에하라 이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귀족에 대한 열등감만 비대하게 커져있고 술독에 빠져 산다. 다자이의 책에는 이러한 -좋게 말해야 사상가들이 술집에서 야망을 떠들고 지식인을 비난할 뿐인 비루하고 천박한 인종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 발짝 떨어져 상상해보면, 어쩌면 나름대로 풍류가 있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시대가 그렇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렇게 전락해버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암울한 시대일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가즈코의 맹목적인 사랑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단골 술집의 다자이


다자이가 술집에서 찍은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아마 비슷한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술잔을 위로 쳐들고 자신의 문학론을 토로하며 혁명을 꾀하는, 그런 모습.
우에하라는 싫지만, 다자이는 좋다.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혁명은 아마 각자, 개인적인, 사람의 수만큼의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사상과 사상이. 민족과 개인이. 귀족과 민중.
모든 게 부딪치고 계급은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시대에서 각자 살길을 찾는 것이다.
혹은 죽을 길을 찾는 것이다.

각자가 믿는 혁명을 쟁취해 가는 것이라면 술에 찌드는 것도, 죽음 역시 혁명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다자이는 그렇게 했다.

 

다자이에게 감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섬세하면서 생동감 있는 여성의 시점 그 자체가 되어 썼다는 것이다. 

여학생의 하루를 그린 다자이의 중편 '여학생'에서도 나타났지만, 둘 다 여성의 일기라는 모티브가 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다른 존재의 심리를 써 내려가는 건 다자이가 문호라고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등장인물이 되어 묘사하는 절제되고 정적인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죽음만 추구하는 늪 같은 작가가 아니다.
분명 희망을 써 내린 걸작도 있다.

 


ps. 다자이의 혈육인 딸이 2020년인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한다. 역사 속 인물 같은 오랜 느낌이었는데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다.

★★★★★★★★☆☆

 

다자이의 다른 작품들

인간실격

이십 엔, 놓고 꺼져

쓰가루

 

 

인터파크에 소와다리판 사양이 있는데 플러그인에는 안 뜬다;

사양
국내도서
저자 : 다자이 오사무 / 신현선역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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