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나를-그린다-표지

메피스토상

나는 메피스토상에 속았다.

 수상작이 전부가 전부 재미있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구매하는 신간에, 거기다 메피스토상이라는 문구에 홀려 판단력이 흐려졌다. 내 취향도 아니었고, 친구도 그런 장르도 읽냐고 반문할 정도였지만, 가끔은 사람이 안 죽고 피 한 방울 안 튀기는─먹은 튀긴다─가슴이 뜨끈뜨끈 해지는 소설을 읽자는 마음을 가진 것인데, 그게 큰 죄는 아니었을 터. 

 

새로운 도전에 천벌을 받아 버렸다.

궁극의 엔터테인먼트. 재미있으면 뭐든 오케이. 심플 이즈 메피스토! 다만 추리소설만이 수상하는 상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 한 권이다.

선은 나를 그린다

특별한 소재를 제외한다면 남은 뼈대는 흔하다면 흔하다. 마음의 아픔을 가진 주인공과 다른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이성을 만나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성장한다는 이야기. 

 

정형화된 'Boy Meets Girl'의 클리셰라고 하면 알기 쉬울 것이다. 무수한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추리면 추리, 로맨스면 로맨스, 온갖 장르들이 막다른 길에 도달했고, 새로움을 주기 위해서 장르를 더하거나 소재를 추가해간다.

SF에 추리를 더하고, 로맨스에 미스터리를 더한다.

 

'선은 나를 그린다' 역시 흔한 틀에서 돋보이기 위해 사용한 장치─소재가 일반 사람에게는 낯선 '수목화'이다.

물론 작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목화라는 주재를 무신경하게 채용한 건 아니다.

놀랍게도 작가 도가미 히로마사는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수목 화가라고 한다. 어떤 이유로 수목 화가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시대에 겸업에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니. 부럽다.

 

작가의 말에서 수목화를 그리는 데 있어 기법이나 마음가짐과 감각 등을 쓰며 '이런 것까지 써도 괜찮은 걸까?'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일개 독자인 나에게 있어서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인물들의 대화에서 나오는 수목화에 대한 이야기야 어찌 됐든 수목화를 그리고 관찰하고 묘사할 때마다 상상은커녕 너무 추상적이라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인물들이 그리는 수목 화조차도 그렇다. 그럴듯한 사진 한 장 없이 장황하게 늘려 쓴 묘사들을 읽어봤자, 여백이고 공백이고 뭐가 아름답다는지도 모르겠고, 장인이 그린 수목화를 보고 놀라 자빠지는 엑스트라들을 보면 웃음도 안 나왔다. 거기다 장인이 수목화를 그린다고 하니 갑자기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면에선 이번엔 실소가 나왔다.

선은-나를-그린다-미디어-믹스

거기다 초반부터 문단속에 '~었다.'라는 짧은 끝맺음이 계속해서 나오다 보니 읽는 호흡이 빨라 짜증을 유발한다. 인물의 묘사나 상황의 묘사들 역시 묘하게 낡은 문체로 읽다 보면 체할 것 같이 소화가 안된다.

 

─낡은 문체.

중간중간 나오는 단어와 표현 묘사가 어디서 본듯한 기시감을 느끼고─예를 들면 '퀸카'라거나─일본의 고전 문학의 향수를 느끼게 되는데, 작가의 나이가 생각보다 어려서 놀랐다. 작가의 문체가 그렇기 때문일까. 신인 작가란 걸 뒤늦게 알았지만, 내 무례한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고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편견이 무서운지, 많지도 않은 등장인물들 중 특히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고마에라는 인물을 보면, 늙은 작가가 애써 젊게 보이기 위해 무리하게 캐릭터성을 부여한─중년이 젊게 보이기 위해 자신은 아직 젊다고 어필하듯, 젊은이들의 유행이나 패션들을 무리하게 쫓아 주변 사람 눈에는 애처로움과 안쓰럽게 비치는 그런 인상이 계속해서 들었다.

수목화라는 구세대의 유산 같은(사실이란 게 아니라 내 얄팍한 인식이) 소재를 젊은 사람이 이어 나가느라 작가의 감각이 그렇게 변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무례천만의 고찰도 해봤다.

 

너무나도 주관적인 단점들만 이야기했는데, 물론 장점도 있었다.

계속해서 낡은 문체라고 했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추상적인 철학이나 깨달음, 점고 선에 대한 몇 가지 표현력들이 가슴을 아주 울리지 않지는 않는다.

 

만화는 관심 없지만 영화화가 된다는데, 수목화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영화로는 보고 싶다.

미디어 믹스의 천국인 일본이라도, 내 평대로의 작품이라면 코믹스화와 영화화가 착착 진행되지는 않을 테니, 나만이 모르는 장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작품의 외적으로 저번 '엠브리오 기담'에서는 옮긴이의 말─번역가의 산통 깨버리는 후기를 마음에 안 들어했는데, 이 작품의 번역가 김현화 씨의 후기는 본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가끔 작품을 번역하는 번역자의 후기에서 느끼는 필력과 이야기에서 놀랄 때가 있는데, 이번엔 당첨이다.

 

★★☆☆☆☆☆☆☆☆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