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브리오 기담
오츠이치─야마시로 아사코의 연작 단편 중 첫 번째 권인 엠브리오 기담이다. 순서대로라면 바로 전 리뷰의 '나의 사이클롭스'가 2권이고 '엠브리오 기담'이 1권인데, 시리즈 인지도 모르고 2권인 사이클롭스부터 읽어버렸다.
연작 단편인지라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으니 다행이지만, 역시 작가가 쓴 흐름대로 읽는 게 순리에 맞지 않나 생각한다─물론 단편이 잡지나 연재처에 게재된 순서와 단편집으로 묶일 때의 순서가 같을지는 모르지만.
당연한 얘기지만 엠브리오 기담은 나의 사이클롭스와 비슷한 흐름으로 간다. 작가 이즈미 로안과 짐꾼 미미히코가 여행을 하며 로안으로 인해 길을 잃고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사이클롭스와 다른 점은 린이 여행에 동참하는 단편이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화자도 대부분 미미히코가 맡지만, 2권에 비해서 혐오감이 덜 드는 게 큰 장점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간중간 술과 도박 중독의 편린이 보이는 게 역시나 혐오스러운 동일인물이라고 확실하게 깨닫는다.
아홉 가지 단편
엠브리오 기담
로안과의 여행 중, 낙태된 엠브리오─태아를 줍게 된 미미히코. 그 태아는 살아있었고 미미히코는 태아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첫 단편부터 미미히코의 한심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에게 싹트는 부성애를 볼 수 있다. 적출된 태아가 살아있는 기묘함과 그 태아를 다시 체내에 넣는 의료기술이 놀랍지만, 마지막에 연출되는 그런 아련한 여운은 좋아한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
린이 등장하는 첫 단편. 여행 도중 린은 아픈 아이를 위해 소중한 약을 사용하고, 그 아이의 할멈에게 파란 보석을 양도받는다. 그 보석의 힘으로 린은 죽은 뒤에도 다시 한번 린으로 태어나며 인생을 반복하게 된다.
연속되는 삶에서 항상 다른 삶을 살고 그 과정에서 리셋되는 인물들과의 추억과 죄책 감등으로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짧은 단편으로 애달픔을 잘 녹여냈다. 2권 사이클롭스에서 계속 등장하는 린이라 1권에서도 비슷한 입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분위기와 내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장 충격이 큰 단편이기도 하다.
수증기 사변
현지인에게 밤의 온천은 가지 말라고 당부받았지만, 전개를 위해서 희상을 당하는 미미히코. 밤의 온천에서 죽은 지인들을 만나 그리워한다. 미미히코도 그쪽으로 가려고 마음 먹지만, 잊고 있던 친구의 저지로 단념하게 된다.
재미는 덜했지만 마무리를 장식하는 감정표현은 여전히 기가 막힌다. 잊고 있던 친구의 유해를 찾아 그리움을 반추하는 미미히코.
끝맺음
두 주인공을 따르는 닭을 데리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린 두 사람은 앓아눕고 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곳의 음식은 채소, 생선, 밥알 할 것 없이 모두 사람의 얼굴이 붙어있는 듯 보인다. 로안은 신경 쓰지 않고 먹어 감기도 낫고 건강해지지만, 미미히코는 계속해서 인면 음식을 거부하고 점점 쇠약해져 간다.
결국 미미히코는 자신들을 따르는 닭의 목을 분 질러 버린 뒤 요리해먹고 기운을 차린다. 시간이 흐른 뒤 숙소에서 짐을 풀던중 보따리에서 닭의 깃털을 보고 미미히코는 공포와 슬픔에 눈물 흘린다.
이 단편은 인면 음식과 극단적인 상황에서 친해진 닭을 먹어버린 선택, 그 행위에 대한 공포와 후회 슬픔 등의 감정보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숨 막히는 어촌. 축축한 공기. 사람 얼굴이 붙은 음식. 신경쇠약의 공포. 러브크래프트의 호러와 많이 닮아있다. 미미히코의 닭 먹기도 퍽이나 유쾌했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한몫했다.
있을 수 없는 다리
로안과 미미히코는 여행중 구름다리를 본다. 근처 마을에 도착해 노파에게 그 다리에 대해 물어보니 있을 수 없는 다리라고 하는데, 사십 년도 전에 이미 무너진 다리라고 하며, 종종 여행객들이 목격한다고 한다.
노파는 미미히코에게 그 다리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다. 여행객이 다리 위에서 아이 그림자를 목격했다고 했는데, 과거 다리가 무너질 때 다리 위에 있던 자신의 아이가 죽었으니, 목격한 아이와 동일인물일 것이라 만나고 싶다는 이유였다. 미미히코는 노파를 다리까지 업어서 데려다준다.
가장 재미없던 단편. 공포도 슬픔도 반전도 아무것도 와닿지 않는다.
얼굴 없는 산마루
길을 잃고 도착한 마을. 마을 주민들은 미미히코를 보고 모두 놀란다. 얼굴 없는 산마루에서 죽은 모키치가 미미히코와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에서였다. 미미히코는 닮기만 한 다른 사람이라고 계속해서 항변했지만, 모키치의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모키치의 과거사와 몸에 있는 점과 상처 등 모든 게 자신과 똑같은 미미히코는 혼란을 겪는다.
쓰레기 같은 미미히코에게 아까운 아내와 자식이었다.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과거를 가진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도플갱어로 살아갈지 고민하는 미미히코가 인상 깊다. 불쌍한 모키치. 모든 걸 뺏길뻔했다.
지옥
다리를 다친 여자를 구해주지만 산적에게 습격받는다. 미미히코는 깊은 구덩이에서 깨어나는데, 구덩이 안에는 막 결혼한 젊은 부부가 있었고, 제목 그대로 지옥 같은 날이 시작된다.
이 단편 집중 가장 재미있는 단편이다.
이런 식으로 고통받는 미미히코는 2권의 단편 '코 베어가는 절'이 떠오른다. 살인, 식인, 인간 박제, 얼굴 가죽 가면, 상처에 들끓는 구더기, 무너지는 가족애, 고문. 온갖 자극적인 소재들로 꾸며졌다. 젊은 부부의 최후와, 산적 일가의 최후 모두 인상 깊어 마지막까지 즐겁게 읽었다.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지옥에서 고생한 미미히코가 요양을 하고, 그사이 여행을 가기 위해 새로운 짐꾼 청년을 고용한 로안. 괴담을 좋아하는 청년은 여행 동안 괴담을 주고받기로 제안한다.
'있을 수 없는 다리'와 함께 가장 재미없는 단편. 거기다 이 단편은 더욱 이질적이다. 로안이 화자인 건 둘째 치고, 그냥 괴담을 읊는 느낌.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소작농인 주인공은 15살에 마을 지주 가문에 시집을 간다. 행복한 생활도 잠시, 남편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에게 온갖 구박을 받기 시작한다. 잔반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밥으로 식사를 하고,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한다. 모욕과 멸시는 기본. 수위는 높아져 온 가족에게 구타까지 당하고, 친정 부모가 죽을 때 자리를 지키지도 못하고 유품마저 장난 삼아 빼앗긴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문이 잠긴 곳간 속에 있는 사내아이를 만나게 된다. 잠긴 곳간에 길을 잃고 들어왔다는 소년(어린 로안)에게 글을 배우기 시 작고, 주인공은 글을 배우는 즐거움을 양식 삼아 힘든 삶을 버틴다.
'지옥'에 이어 단편 집중 가장 재미있는 단편이다.
약자가 학대당하고 위축되고 비참한 삶을 사는 이야기는 기묘한 배덕감에 언제나 두근거린다. 소년과 주인공의 관계성과, 하루뿐인 여행 속에서 소년이 보여준 천변만화 하는 바깥세상의 풍경들. 그림이 되는 절절한 드라마가 담겨있다. 시간이 흘러 주인공과 로안이 다시 만나게 되려는 장면은 흔할지도 모르지만, 흔한 만큼 효과는 뛰어나다. 다시 만난 둘의 후일담을 더 읽고 싶다.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이 있다. 사이클롭스에서도 그랬지만. 역자 후기에서 역자에게 이상한 바람이 불었나, 작품을 오마주 해서 이야기를 써놓았는데, 사족도 이런 사족이 없다. 단편들을 다 읽은 뒤 여운을 느끼고 있는데, 역자가 온갖 주접을 떨며 써 내려간 사족으로 분위기를 깨부수어주니 불쾌함이 솟구쳤었다.
작가가 작가로 있을 수 있는 재능은 이야기를 짓는 힘과, 절절한 감정을 글로 옮기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서,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은 타인이 될 수 없는데, 온갖 인간 군상을 만들고 상황과 사건에서 그 인물 자체의 사고를 써 내려간다는 것이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2권인 '나의 사이클롭스'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미미히코가 덜 혐오스러운 덕도 있고, 각 단편들의 내용 자체도 더 뛰어나다고 느낀다. 어서 빨리 미미히코가 죽은 시리즈의 3권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