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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세이료인-류스이

 

조커

드디어 나왔다.

코즈믹을 읽고서, 바로 다음 작품 조커까지 번역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봤고, 그 뒤로 생각날 때면 한 번씩 용기 있는 출판사(비고)에 들어가 보며 이제나 저제나 오매불망 애달프게 기다리던 그, 세이료인 류스이의 대설이 드디어 출판됐다.

 

아득해질 정도로 오랜 기다림 끝에 손에 넣은 조커는 코즈믹을 뛰어넘는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무려 1215페이지 정도. 구매때 가격이 좀 비싼 거 같긴 했는데, 이 정도 분량이면 비싼 축에도 못 낀다. 노가다 하루 정도 뛰어서라도 손에 넣어라.

 

감격했다. 코즈믹에 이은 심플한 표지 디자인. 압도적인 질량. 그 안에 세이료인 류스이가 철저히 계산해서 배치했을 온갖 사건과 미스터리, 추리의 향연. 두근 세근 기대 천만 정말 너무 벅차올랐다. 독서의 고난을 이겨내려면 이만한 감동은 시작부터 느끼고 봐야 한다. 

 

그렇게 한장 한 장 기대하며 넘겨 완독─류스이가 친절하게 '완독'이라고 알려준다─한 감상은―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선사해 줬다.

 

구름 위에서 갑자기 수직 낙하한 감각. 아니면 지옥 밑바닥까지 도달한 줄 알았는데, 더욱 깊은, 압도적인 수렁까지 땅이 꺼져 떨어진 느낌.

 

고작 코즈믹 한 권을 읽고 세이료인 류스이를 어느 정도 알았다고 자만한 내가 나빴다. 이 작가는, 문제적 작가인 세이료인 류스이는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니시오 이신이, 마이조 오타로가, 신이라고 칭송했나. 신은 신이어도 악신이다

 

등장인물 표부터 이야기해보자. 

류스이는 모든 등장인물 옆에 기호표를 넣어놨는데, 그 표시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범인일지도?

○=조금 의심스럽다. 확인 필요.

△=범인이어도 딱히 의외는 아니다.

×=만약에 정답이면 의외의 범인.

사건의 배경이 되는 환영성의 직원도, 모인 추리 소설가들도, 그들의 아들, 딸들도, 수사하러 찾아온 경찰들과 JDC탐정들 마저도, 누구 하나 빠짐없이 기호표를 남겨 누구 하나 믿지 말라고 언질해 둔다.

 

없어도 똑같겠지만, 표시함으로써 탐정도 경찰도 일꾼들도 일개 엑스트라가 아니게 됐다. 확대해석이라도 상관없다. 시작부터 의심암귀에 빠지니, 앞으로 1215페이지의 추리소설을 읽어갈 독자로서 훌륭한 자세 아닌가.

 

그리고 그 등장인물표의 전과 후에 벌써 독자에게 보내는 '도발장'을 첨부해 뒀다. 범인은 단독범이며, 공범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이 작가 너무 상남자다. 그걸 넘어 산짐승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등장인물 표에 아오'키' 겐타로라고 써있는데, 본문 20P부터 아오'이' 겐타로다. 오타인가?)

 

이번엔 등장인물 중 하나인 다쿠쇼인 류스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이름그대로 작가 자신이 모티브 같다. 벌써 메타추리물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이 부분이 웃긴데, 중간에 류스이가 과거 굉장한 싸움꾼이며, 지금도 때때로 내면의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는다나 어쩐다나 기묘한 묘사가 나오는데 읽다가 민망했다.)

 

환영성에 모인 추리작가들은 저마다 이야기 꽃을 피우며 즐기는 와중에 다쿠쇼인 류스이(이하 다쿠쇼인)가 새로운 소설의 태마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탐정소설이 지켜야 하는 계율인 '녹스의 10계'와 '반 다인의 20칙'을 어레인지 한 자신만의 30가지 문항을 망라한 작품을 쓰겠다는 아이디어였다.

 

저마다 의견을 내며 즐기는 와중에 그 30문항을 인용한 연쇄살인이 예술가artist라고 칭하는 범인의 손에 일어난다.

 

 

言말이 迷헤매면 謎수수께끼가 된다.

역시나 또 등장한 파자다. 

코즈믹 때도 그랬지만, 조커는 더욱 더 말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언어유희로 장난을 치는 작가는 니시오이신이 최고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위에는 위가 있고 니시오 이신의 神신인 세이료인 류스이의 말장난은 차원이 달랐다. 이 작품 한 권 자체가 글자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계산된 말장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장의 부제와 등장인물의 이름, 범인이 남긴 단서 대사 하나 하나 미스디렉션 전부가 전부 말로 통하고 말로 이어진다.

 

말만이 끝없이 돌고 돈다.

피해자가 증가함에 따라, 내몰린 탐정들은 증거도 물증도 없고, 미스터리의 수수께끼마저도 남겨둔 채, 예술가 artist가 남긴 미스디렉션과 언어의 유희 만으로 범인을 추론해내려고 한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반전되는 진상에 등장인물 모두 휘둘리고 만다. 

예술가artist가 준비해 놓은 가짜 진상과, 그 뒤의 진짜인듯한 가짜진상. 그 뒤의 또 다른 숨겨진 진상, 완독에 가까워졌을 때 등장하는 새로운 진상. 

 

겹겹이 쌓이는 가짜들에 이도저도 못하고 피해자만 늘어나자 드디어 세기의 명탐정. 필요한 데이터가 모이면 진상을 깨닫는 신통이기'神通理気'의 추리법을 가진 쓰쿠모 주쿠가 사건을 해결하기위해 환영성에 도착한다. 

작자의─범인, 예술가 artist─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건 메타탐정인 쓰쿠모 주쿠밖에 없다.


사건의 피해자?는 대략 2마리를 포함한 20명 정도 된다.

이게 너무 마음에 든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피해자의 향연. 남자도 여자도, 사람도 동물도, 노인도 아이마저도 예외 없이 죽어나간다. 환영성에선 모두에게 똑같이 죽음이 내린다. 죽음만큼 공평한 건 없다는 듯이. 류스이가 겪은 고베 대지진의 영향일까. 이것도 확대해석의 망상인가. 뭐 상관없다.

 

이렇게 목놓아 칭송한게 무색하게, 조커는 결말에 와서 추리소설이길 포기했다. 아마 이 부분이 추리소설의 독자라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 모욕적인 부분이기에 류스이의 작품은 유명하지만 팔리지 않는 작품이라는 멸칭이 붙은 것일지도 모른다. 

 

트릭의 조악함도 있다. 문보다 좁은 샹들리에는 분해해서 조립해 넣고, 난공불락의 밀실역시 판자를 떼서 들어갔다 나오면 됐다. 거기에 말그대로 트릭도 없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건마저 있으며 해석도 없다.

 

 

예술가 artist가 어떻게 피해자를 꿰어내고 건장한 형사를 잡아다 죽이고, 권총을 소지한 형사 둘을 밤중에 조용히 죽여버리는지, 식당의 얼음틀은 어떻게 빼돌리고, 방 한 면을 가릴 얼음은 어떻게 준비했는지. 물은 어디서 어떻게 끌어와 죽였는지. 그런 추리의 부수적인 해설도─주로 타임로그에 관한─존재하지 않다.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난 오랜만에 분량도 많은 책을 즐겁게 술술읽었다. 

결말에 와서 누구라도 상관없는 말을 들어도, 1000페이지를 달리며 이어지는 군상극은 이야기로서 가짜추리물로서 탐정의 캐릭터 활극으로서의 재미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말장난도 그렇다. 대체 어느정도의 준비를 했기에 그 다양한 말들을 뒤섞어 이 정도로 엮어낼 수 있는 걸까. 확실히 일본인이 아니면 맞출 수도 없고 일본어가 아니면 만들 수도 없는 작품이다.

 

다른 재미있는 부분은 메타적인 발언이다.

작중작으로 등장인물들 마저도 너무나도 비현질 적인 현실에 자신들이 다쿠쇼인이 쓰는 작품의 등장인물이 아닐까 헛된 망상까지 하는 상황에서, 묘사마저도 '나' 혹은 '당신'이라며 독자에게 말을 걸듯 이야기하고, 기묘한 시들이 중간에 섞여있다. 현실같은 꿈과 꿈같은 현실이 뒤죽박중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기에 현실의 추리소설과 작가들이 언급되고 중요한 키워드인 아야츠지 유키토나 일본의 4대 기서인 유메노 큐사쿠의 '도구라 마구라',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 나카이 히데오의 '허무에의 제물', 다케모토 겐지의 '상자 속의 실락' 등이 등장하며 더욱 4의 벽을 허무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작품이 이러니 쓰쿠모 주쿠의 작자의 의도를 읽는 신통이기 추리법이 아이러니하게 어울린다.

 

재미있던 메타 발언을 뽑아 보자면,

추리작가 한명이 자신이 도출한 추리를 피로하기 전, 

'이게 추리소설이라면 독자들은 남은 페이지를 보고 이게 진짜 해결인지 가짜 해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읽는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남은 페이지는 얼마나 될까. 이게 진짜 해결일까? 아니면 단순히 가짜 해결에 불과할까?─'하고 망설이는 장면이다.

작중작의 느낌을 주며 등장인물과 독자의 괴리감에 우습지만, 추리소설속 등장인물의 간절함을 절절하게 내포하고 있다.

 

추리소설의 독자 중에는 진상을 막연하게 예감했을 뿐이면서 본인이 트릭을 간파했다! 라고 어수룩하게 착각하는 분이 있다―거나,

탐정의 추리를 듣고 자기가 생각한 진상이 맞았다며 주제도 모르고 우쭐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어쩐지 그렇다고 예감한 것과 분명하게 아는 것 사이에는 백만 광년 이상의 거리가 있음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라거나.

아주 막말을 해대는 작가다. 나도 사실 환영성에서 도피하고 실종된 인물과, 과거의 기억을 잃었던 탐정 기리기리스 다로의 동인인물 설을 생각했는데, 민망하게 됐었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틈틈이 청량음료를 마시는 장면. (필명인 세이료인 류스이는 청량음료수를 청량원류수로 바꾼 것이다.)

 

읽다 보면 어디까지 꼬아놓은 건가 너무 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탐정의 개성도 너무 황당한 거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밀어붙이면 무리는 통하는 법이다. 미친 척을 할 거라면 똥까지 주워 먹으면 된다. 할 거면 뇌절까지 하라 이거다. 그럼 이만한 작품을 뽑아낼 수 있는 신이 될지도 모른다.


해설을 보면 자연적 리얼리즘이니 뭐니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많은데, 이런 걸 읽을 때마다 작가는 그런 걸 고려한 적도 없을 텐데, 멋대로 분석하고 해석해서, 그게 맞다는 듯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

 

만약 그런 말들이 소설에 부합한다면, 작가의 계산이 아닌 시대의 흐름대로 나올 작품이 나올 시기에 등장한 게 아닐까. 시대의 성격과 유행. 부흥과 쇠락의 분위기는 확실히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작품에 스며들 가능성이 있으니, 작품을 보고 시대의 흐름과 분위기를 읽어내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호불호가 크게 갈릴 작품이지만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출판사 비고 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그리고 류스이의 다음 작품도 여유가 있다면 출판해 주시길. 더욱더 여유가 있다면 4대 기서들도 출판해 주시길.

너무 읽고 싶어요. 흑사관은 전에 새로 나온 거 같지만, 도구라 마구라 중고가는 너무 비싸고 찾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드라마 카지노는 엔딩 쓰레기가 맞습니다.

아참. 추리에 중요하니, 부제목 소제목들 밑에 히라가나를 적어놨으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못 맞추겠지만.

 

ps. 코즈믹 리뷰에서 언급했던 그/그녀를 '그'로 통일한 번역이 말이 많은 거 같은데 원서에는 확실히 그/그녀로 나눠져 있다고 합니다. 훌륭한 출판사가 약동하는데 불순물은 걸러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아시겠지만, 추리소설에서 성별도 중요한 요소인데, 쓸데없는 망집으로 작품과 출판사에 피해를 끼치는 번역가는 빨리 갈아 치워 버리시길.

 

★★★★★★★★☆☆

코즈믹 / 세이료인 류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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