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이후의 결말까지 너무나 쓰고 싶지만, 직접 읽어보길 바라기에 최대한 결말을 피해 썼다고 생각한다.

바쁜 분은 맨 밑 '끝으로'항목부터 읽으세요.

 

소년/다니자키 준이치로/단편집/130p/민음사/쏜살문고

책에 대하여.

민음사에서 엮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전집 중 한 권.

 

책의 크기도 손에 딱 들어오며 그립감이 뛰어나다.

바야흐로 책 표지의 전성시대. 처음 봤을 때 이쁘고 아름다운, 잘 만든 표지가 구매율의 80%는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좀 별로여도 표지가 이쁘면 어쩐지 용서된다! 는 풍조도 생긴듯하다. (표지라도 건졌다.)

 

최근 몇 년간 출간되는 책들의 디자인이 이뻐진 게 너무 좋다.

이 책 역시 표지의 디자인이 무척 이쁘게 나와서 한눈에 소장하고 싶어 졌다.

 

앞서 읽은 '치인의 사랑은' 가격 대비 300페이지가 넘기에 가성비가 뛰어났지만, 이 단편집은 다소 짧은 게

아쉽다. 여백을 줄여서 그렇지 일반적으로 만들었다면 페이지수는 늘었을 것.

다만 내용면에서 모든 걸 커버하기에 전혀 아깝지 않다.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가에 대해서 짧게 얘기하자면.

4회 연속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일본 문학가 최초로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에 선출되는 위업을 달성한

대 문호 작가이다.

 

아닌 말로 다니자키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노벨상은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니라 다니자키가 받았을 거란 얘기도 아직까지 존재한다.

 

25세의 나이에 처녀작 '문신'을 쓰며 데뷔했는데 그 짧은 단편은 이후 작가 인생 50년, 문학의 방향성이 결정되어,

여성 숭배, 마조히즘, 에로티시즘, 극한의 탐미주의를 추구하는 작가가 된다.

(여기서 여성 숭배는 요즘 말하는 페미니즘과는 다를 것이다.)

 

문신

첫 문장부터 사로잡는다.
미추(美醜)의 카스트.

때는 아름다움이 미덕인 시대.

자신만의 미를 더욱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신체를 문신으로 물들이기 시작했고, 문신의 명인이라 칭송받던 '세이키치'를 찾아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하고 바늘의 고통마저 문신이 완성될 때까지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감내한다.

 

세이키치에겐 기묘한 취향이 있는데 바늘을 찔러 넣을 때 고통에 신음하는 손님들을 내려다보며 쾌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오랜 숙원이 있다. 광채 나는 미인의 살갗에 자신의 혼-문신을 새겨 넣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준에 딱 들어맞는 미인을 찾지 못하고 끙끙대는 어느 날 가마에 드리운 그림자 밑으로 여인의 새하얀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가마를 쫓아 달려보았지만 놓치고 만 세이키치는 또다시 그 맨발을 그리워하며 그의 감정은 격정적인 사랑으로까지 변해버렸다.

 

몇 달 후 세이 키치 앞으로 여자아이가 심부름꾼으로 보내졌는데, 심부름꾼 아이가 그 맨발 여인인 것을 한눈에 알아본 세이키치는 그녀의 등에 문신을 새길 것을 다짐한다.

 

소년

그들의 놀이.

소(초등) 학교 4학년인 '하기와라 에이'가 항상 하녀를 데리고 다니는 소문난 겁쟁이 '하나와 신이치'의 집에 초대받아 시작된다. 

고풍스러운 신이치의 저택에 도착한 에이는 집의 크기에 놀라고, 학교와는 다른 신이치의 행동에 놀라게 되는데. 신이치는 저택에서는 이복누나인 '미쓰코'에게 대들고 멍들 만큼 때리며 울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신이치네 집 마부의 아들인 '센키치'가 있는데 두 살 위에 고목 대장인 센키치마저  장난감처럼 부려먹는 신이치의 포악한 모습이었다.

 

신이치의 '놀이'는 센키치를 묶고, 핥고, 깨물고, 밟고, 매질을 하며 침 뱉는 등의 무척이나 가학적인데 에이는 두려워하면서도 어쩐지 같은 꼴을 당하겠지 하며 묘한 쾌락을 느끼게 된다. 

 

놀이를 거듭하며 신이치의 저택을 드나들던 차에 어느덧 미쓰코까지 놀이에 참전하게 되는데, 미쓰코 역시 개처럼 네발로 걸으며 뭉개진 떡을 입으로 주어먹으며 점점 놀이에 빠져든다.

 

놀이는 어느덧 칼로 조그마한 상처를 입히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느 날 신이치가 없는 저택에 에이와 센키치는 미쓰코에게 평소에 출입이 금지된 서양관에 몰래 들어가게 해줄것을 요구한다. 완강하게 거절하는 미쓰코에게 놀이를 하며 승낙을 받아내고 같은 날 밤 에니는 서양관 입구에 선다.

 

작은 왕국

가이지마의 결정.

도쿄에서 시골로 이주한 가이지마의 가족.

소학교 선생인 '가이지마'는 아이들의 심리를 꿰고 있다고 자부한다. 시골학교의 교편을 잡은 지 2년째 되는 봄날. '누마쿠라 쇼키치'라고 하는 까무잡잡한 남학생이 전학 온다.

 

가이지마는 첫 인상으로 성적이 나쁘고 품행이 나쁜 학생이라고 확신했지만 쇼키치는 성적도 평범하고 성격도 온순하고 과묵한데다 카리스마도 있어서 반 학생 대부분이 그에게 긍정적인 굴복을 보였다.

 

가이지마는 쇼키치의 통솔력과 반 학생을 따르게 하는 카리스마를 이용하고자 쇼키치에게 학급을 좋은 쪽으로 이끌도록 다짐받는다.

정돈되는 교실과는 다르게 가이지마의 집은 점점 더 몰락일로를 걷게 되는데, 애초에 자금난 때문에 도쿄에서 시골로 이주한 것이지만 노모가 병들고 자식은 7명에 아내마저 아프기 시작하여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만큼 가난에 허덕이게 된다.

 

집안 사정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가이지마는 아들에게서 가이지마의 부탁으로 시작된 쇼키치가 학급에 군림한 결과로 이룩한 작은 왕국의 소식을 듣게 된다.

 

끝으로.

이 한 권으로 다니자키가 추구한 문학과 미를 엿봤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과, 평범한 것을 독자에게 아름답다고 느끼게끔 승화시키는 묘사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문신'에서 섬세한 표현의 발과 '소년'에서의 동화 같은 몽환적인 풍경과 건물 묘사.

 

마치 그 장면들을 영상으로 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글을 읽었지만 망막에는 장면이 비춘다.

피학심과 가학심. 마조히즘과 사디즘. 

 

여인의 새하얀 등에 완성된 문신과, 저택에서 서로를 학대하며 즐기는 장면들에서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들만의 비밀 놀이를 문틈 사이로 엿보는 것만 같은 심상이 그려진다. 

양손으로 책을 살짝 핀 틈을 한쪽 눈으로 보는듯한.

 

문신을 한 뒤, 서양관에 들어간 뒤, 이야기의 후반에서 변화하는 피학과, 가학. 여자와, 남자. 굴복과, 숭배. 변화하고 뒤집히는 반전되는 입장들과 그렇게 싹튼 -완성된 자아의 후일담을 상상해보는 것도 무척 즐거운 일이다.

 

조금 오버해 보자면,

분명 영혼이 떨릴 정도의 아름다운 무언가를 마주한다면 굴복하고 무릎 꿇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숭배할 수밖에 없다.

일평생을 매달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쓰면서 떠올랐는데 '치인의 사랑' 후기에서 '어린 다니자키는 어머니와 목욕하면서 살결이 너무 희어서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다시보곤 하였다'라는 일화가 나온다.

어쩌면 다니자키는 떨릴 정도의 아름다움을 그때 목격하고 굴복했으며 그 과정에서 새어 나온 쾌락에 숭배와 마조히즘이 발현?된것이 아닐까 싶다.

 

-떠오른 망상인데 혹시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인가? 대작가에게 실례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재연하기 위해 자신의 글에서 계속해서 추구해온 게 아닐까 싶다.

다니자키의 일화를 보면 아름다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작은 왕국은 앞의 두 작품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니자키의 문학활동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이라고 할 만큼 사회 풍자가 담겨있다고 한다. 확실히 앞의 두 작품을 읽고 세 번째 단편인 작은 왕국을 읽고 나면 괴리감이 장난 아니다. 

 

이색적이라는 만큼 작품 순서를 일부러 노리고 배치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래도 재미있긴 마찬가지고 마지막 가난에 굴복한 가이지마의 선택과 대사, 행동들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탐미주의의 극치라는 표현이 아깝지가 않다.

이전 세대에도 같은 뜻을 추구한 작가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니자키의 관능적인 여성 숭배와 에로티시즘은 어떤 금기와도 같은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로 다가온다.

 

반평생을 추구해왔던 것에 몰두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ps. 소년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아가씨'와 김기영 감독의 '하녀'.

작은 왕국에서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떠오른다고 한다. 난 셋다 안 봐서 모르겠다.

명작을 리뷰하면 나까지 심취해서 글이 야릇해져 버린다.

 

 

새로운 취향 생길지도?

★★★★★★★★★★

소년
국내도서
저자 : 다니자키 준이치로(Tanizaki Junichiro) / 박연정역
출판 : 민음사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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