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책은 에로의 선구자, 변태가 아닌 에로. 에로의 정점. 신념 있는 변태,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말년에 집필한 책중 하나인 '미친 노인의 일기'입니다.

미친 노인의 일기

  • 들어가기 전에.
  • 미친 일기.
  • 결말이란.

미친 노인의 일기

들어가기 전에.

우선 다니자키의 전집을 이쁜 표지로 엮은 쏜살 문고(이하 민음사)를 좋아한다. 

다니자키 작품이 풍기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분위기를 엮어낸 전집 전부, 붉은 색감을 이용하여 야리꾸리하게 표지들을 장식해 줬는데, 이번 표지는 작품 속의 내포한 모든 것이 잘 표현됐다고 격하게 느낀다.

 

반지와 발, 노인과 솜뭉치.

완벽하지 않은가. 그저 이야기 속 키워드를 그려낸 게 아니다. 작품의 구도와 분위기를 절묘하게 표지 속으로 녹여낸, 다니자키 작품과 함께 완성된 예술품이다.

 

칭찬은 여기까지 하고, 이 전집은 총 세 권 읽었는데 장단점이 뚜렷하다. 장점은 위에서 말한 표지다. 표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아낸다. 그리고 가격. 가격은 장점으로 보긴 애매한데, 대략 8800원으로 보면 싸지만 작품이 생각보다 두껍지가 않다. 

 

싸다고 생각하고 사면 낚인 기분이 들기도 하다. 다만 이것은 판형이 기묘해서 그런데,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의도를 모르겠다. 가로길이가 짧고 세로 길이가 길다. 작으면 그립감이 좋다고 느껴지지만 좀만 읽다 보면 좁은 세로 길이에 위화감이 들어서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거기다가 글씨가 작고 문장 사이의 여백이 적어서 읽기 힘들지도 모른다. 단점들은 익숙해지면 나아지지만, 텀을 두고 전집들 중 다른 작품을 구매하면 또 느껴지는 위화감에 곤혹을 치른다.

 

전문가의 깊은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지한 내가 보기에 이럴 바엔 세로를 줄이고 글씨를 좀 더 키운 뒤 책의 쪽수를 늘려 그립감에 안정을 더해 만드는 게 나았으리라 감히 생각한다. (심플하게 가로폭을 세로에 맞춰 늘리거나.)

 

미친 일기.

제목 그대로 이 책은 곧 죽을 것만 같은 자산가 노인이 미쳐가며 쓴 일기의 형식을 하고 있다. 

 

일흔을 넘기고 입주 간호사가 필요하며 아내와 각방을 쓰고 자식들과의 사이도 나쁘다. 그런 가정 속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 사쓰코이다.

 

노인의 성기능은 당연히 상실했지만, '성기능이 없어도 성생활은 있는 법.'이라고 하며 은밀한 도착을 즐기며 흥분하고 명줄을 불태우며 사쓰코에게 집중한다.

 

다니자키의 작품인 만큼 사쓰코 역시 보통 며느리가 아니다. 노인의 정념을 꿰뚫어 보고 자신에게 관심이 쏠린 것을 알고 노인을 농락하며 비싼 물건들을 구매하게 만든다.

 

그렇게 샤워하는 며느리의 발을 핥는 것도 지겨워지고 몸도 점점 쇠약해져 가는 나날. 노인은 자신의 묫자리를 알아보는 중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무덤 속 자신의 뼈 위에 사쓰코의 발바닥을 본뜬 돌을 올려서 죽어서도 밟히고, 쾌감을 느끼며 사쓰코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가겠다는 야심. 혹은 망상이다. 

 

그렇게 노인은 사쓰코의 발바닥에 붉은 칠을 하고 본을 뜨기 시작한다.

 

결말이란.

결국 어떻게 된 것인가. 이해가 갈듯 말듯하다. 열린 결말인 건가?

후반에 노인이 죽기 직전의 의사 일기에 -노인의 기행과 성벽은 삶의 원동력이라 곧 죽을 것만 같은 생명줄을 지탱하고 있으니 그의 상응하는 대접이 필요하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전부 노인의 기행을 알고 그것에 맞춰준 것뿐인가? 사쓰코의 행동 역시 의사의 처방대로 노인을 위한 연기를 했던 것인가. 다가가지 않으면 상심해 기운을 잃고, 너무 나가가면 흥분이 지나쳐 다시 건강을 해치니, 노인을 그렇게 애태운 것인가?

 

반지와 수영장을 요구한 것은 가족 모두가 노린 것인가?

 

중간까지 재미있게 읽었는데, 어째선지 점점 집중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취향상 주인공을 애태우는 여자의 인물상이 비슷비슷해서 새롭지가 않다. 특별한 점을 뽑자면 그건 애로의 시추에이션인데, 노인의 마지막 사상도 그랬지만, 이 작가는 진짜구나 감탄했다. 다만 그것만으로 밀고 나가기엔 내 집중력이 못 미쳤다.

 

노인의 시점에서 노인의 일기를 읽다 보면 기운 빠지는 게 장난 아니다. 노인이 연명하기 위해서 항상 간호사가 상주하고, 의사에게 진찰받고 침을 맞고 의료기구에 몸을 맡겨야 한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채찍질해서 살아나간다.

 

어쩌면 후반에 집중되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인이 매일같이 먹고 읊어대는 수많은 종류의 약들. 계속해서 하루에 몇 번씩 몇 종류의 약을 수십 개씩 먹는 묘사를 하는데 읽어가면서 기운이 쭉쭉 빠진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 이유가 있을까. 그저 '살아있기'만 하는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말 의사의 말대로 정욕만이 노인의 지겨운 생활의 활력소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렸다.

 

중간까지는 좋았는데 아쉬운 작품이 되어버렸다.

★★★★★☆☆☆☆☆

 

다니자키의 다른 작품.

문신/소년/작은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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