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온다 리쿠/364p/북폴리오/권남희

이 책을 읽기까지가.

몇 년 전까지 나는 구매한 책은 아무리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어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읽지 않거나 도중에 하차 했다면 책장에 꽂힌 그 책만 봐도 찝찝했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바람에 대충이라도 고생하며 읽어내고야 마는 손해 보는 성격이었는데.

거기에 한번 손에 들어온 책은 버리는 것도 어쩐지 아쉽고 그렇다고 중고 매장에 팔기에도 역시 싫은. 그런 절조 없는 소장욕구가 한 때는 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팔러 가기는 귀찮고 둘 자리가 없을쯤에 고르고 골라서 사진을 찍어 소장했다는 증거를 남긴 뒤 내다 버린다. ―이것도 번거롭긴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그런 나에게 온다 리쿠의 책을 읽을 기회가 왔다.

 

한창 돈이 없어 정가 인하된 책만 찾던 시기에 '유지니아' 라는 온다 리쿠의 책을 구매했는데, 초반에 무척 흥미진진하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고, 뒷 내용은 르포소설 같기도 하고, 좀처럼 내가 원하던 사건의 해결은 나오지 않고 그저 알 수 없는 인터뷰만 줄곧 나오는 그런 짜증 나는 이야기뿐이었다.

다음에 읽은 작품이 '6번째 사요코'. 이건 괜찮았다. 미스터리로서나 청춘물로서나. 

다음에 읽은 게  'Q&A'. 아까의 유지니아와 완전히 같을 정도로 읽기 싫은 비슷한 내용의 쓰레기였다.

포기하지 않고 다음에 손에 넣은 책은 '밤의 피크닉' 이번에 리뷰할 책이었다. 

밤의 피크닉은 앞서 그나마 괜찮게 읽은 6번째 사요코보다 월등하게 재미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손에 꼽을 만큼 높은 평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청춘 소설 중에 하나다.

그 후 기대를 안고 읽은 게 '삼월은 붉은 구렁을'. 알고 싶지 않은 쓰레기 잘 읽히지도 않는다.

그다음이 마지막 '도서실의 바다'. 이 책은 '밤의 피크닉' 전날 밤을 담은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일부러 구매한 것이다. 그 외엔 쓰레기였다.

 

앞서 말한 내 손해 보는 성격은 여기에서도 이어지는데, 아무리 재미없는 책이어도 한 번쯤 괜찮았다 싶은 책을 썼던 작가라면 몇 번이고 그 작가의 책을 구매해 도전하는 것이다.

지금에야 시간도 돈도 딸리는 비루한 인생인 만큼, 책을 살 때는 고민하는 편인데, 같은 작가의 책을 한 두 번 읽어 본 뒤 안 맞으면 다시는 그 작가의 책을 구매하지 않지만,―한 번으로도 손절한다.― 저 때는 멍청하다고 할까, 작가에 대해서 믿음이 컸던 것 같다.

 

자그마치 6권. 쓰레기 4권, 평타 1권, 명작 1권.

기가 막힌 낭비라고 할 수 있는 ―돈, 시간, 고생― 이 고행이 '밤의 피크닉'이라는 매력적인 한 권을 위해서였다고 말한다면, 말이야 이쁘지만. 

덤으로 고르고 골라 버렸던 책의 첫 주자는 단연 온다 리쿠의 책들이었다.

그러므로 난 저 6권을 읽은 뒤로 아무리 높게 평가받는 온다리쿠의 책이라도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됐다.

 

사설이 길었다.

'밤의 피크닉'에 대해 이야기하자.

 

밤의 피크닉.

남녀공학인 '북고'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다.

그것은 밤을 새워 아침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자그마치 80km를 걷는 '야간보행제'.

매년 행해지는 이 야간 보행제는 고등학교 3학년생인 등장인물들에게 마지막 학교 행사로 만 하루를 주야장천 걷는 행군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북고를 졸업한 선배들은 하나같이 기억에 남는 행사로 손꼽는데, 앞서 2년. 두 번을 진행해본 등장인물들은 그 의미를 알고 저마다 특별한 마음과 뜻을 품고 행사에 임한다.

 

'니시와키 도오루'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족과 목표를 위해 최단거리로 '어른'이 되어 독립하고 싶어 한다.

'고다 다카코'는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을 안고서 야간 보행제 기간 동안 홀로 어떤 '내기'를 개시한다.

'도다 시노부'는 반에서 누구에게나 신뢰받고 있다. 그는 보행제의 마지막을 도오루와 함께 완주하기로 약속한다.

'유사 미와코'는 다카코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반에서 손에 꼽는 미인이다. 통찰력 있는 그녀는 다카코와 도오루를 위해 시노부와 함께 힘쓴다.

'다카미 고이치로'는 도오루 반의 분위기 메이커. 록에 심취해있으며 밤새 록음악을 듣느라 낮에는 초주검 상태였다가 밤에 부활하여 의욕이 넘치고 활발해진다.

 

도오루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곧 졸업이 가깝구나. 하는 것을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노스탤지어의 마술사. 

2005년 출간된 밤의 피크닉은 제2회 서점대상을 수상했다.

'노스탤지어의 마술사'. 솔직히 좀 부끄러운 네이밍이지만 밤의 피크닉을 다 읽은 뒤에는 충분하게 납득이 되는 자랑스러워해도 될 만한 이명이라고 생각했다.

 

밤의 피크닉에는 무수한 장점이 있고, 전부 읽으면 분명 누구나가 인정할만한 힘이 있다.

80km의 행군에서 등장인물들의 고민과 감정들을 정확하면서도 섬세하게 전달해준다. 그것이 사랑이든 진로든 비밀이든 우정이든 깨달음이든. 빠짐없이.

누구나가 학생 시절에 느껴왔을 성장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한 번쯤 떠올려봤을 독백들을 온다 리쿠만의 필력으로 깊게 전해준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들과 하늘. 분위기.

만 하루 동안 시간이 지나며 변화하는 주위의 풍경과 배경. 하늘에 내리쬐는 태양부터, 밤에 차오르는 달.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까지.

밤의 피크닉은 시공간의 변화를 아름답게 이야기한다.

행군 중간중간 잠시 쉬는 시간에 찌르는 듯한 아픔, 걷는 중 과한 운동에 항의하는 몸의 비명들. 작렬하는 태양빛과 바닷 공기. 태양 빛을 밀어내고 밤이 찾아오는 황혼과 밤공기.

 

"모두 밤에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특별한 걸까."

처음에는 소풍을 온 듯 즐겁고 들뜬 학생들의 분위기다. 옆에 있는 친구들과 떠들고 기세 등등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쳐가고 말이 줄어든다.

앞서가는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땅만을 바라보며 그저 다리만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밤 휴식 때는 결국 모두 초주검 상태로 묵묵히 쓰러져서 쉰다. 출발 신호에 맞춰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몸을 일으켜 다시 행군을 개시한다.

그래도 마지막이 다가오면, 또다시 들뜬 마음에 분위기는 달아오른다.

 

이 책에는 밤 공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학창 시절 느껴보았을 수학여행에서 처럼 들뜬 기분. 걸을수록 점점 전해지는 몸의 고통. 잠시 앉아 쉴 때의 탈력감. 묵묵히 걸을 때 떠오르는 잡념들. 밤공기를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감성 차오르는 기분.

분명 누구나 느끼거나 겪어보았을 감정들을 밤의 피크닉을 읽으며 다시 한번 떠올리고 마치 자신도 주인공들과 함께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도착할 수 있을까. 이 녀석과 함께 골인할 수 있을까.
도오루의 머릿속도 불안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전속력으로 달릴 뿐이다.

별거 없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비밀 하나와 그저 만 하루를, 서로 이야기하며 걷는 내용일 뿐이다.

하지만 밤공기의 마력에 취해 감성적이 되거나 자신만의 작은 비밀을 털어놓게 되는 그 찰나들.

마음의 경계가 한 단계 풀린다. 밤공기의 비 일상을 담는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작가는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걷는 길에 대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어른과 아이의 경계 등등. 

메타포적인 의미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런 어려운 얘기와 분석은 운치 없으니 하지 말자. 잘 모른다.

낮은 바다의 세계이고, 밤은 육지의 세계다. 도오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야말로 그 경계선에 앉아 있다. 낮과 밤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여러 가지 것의 경계선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른과 아이,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허구.
보행제는 그런 경계선 위를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어가는 행사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냉혹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갈 뿐. 고교생이라는 허구의, 최후의 판타지를 무사히 연기해 낼지 어떨지는 오늘 밤에 정해진다.

 

 

나는 청춘, 성장 장르는 별로 안 좋아한다.

내 학창 시절은 청춘도 없고 하물며 성장도 못하고 지금까지 이런 꼴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풋풋하게, 아릿하게, 즐겁게, 청춘의 상징인 비밀과 사랑, 우정들을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이야기한다. 밤공기에 빠져 메마른 감성을 설레게 만든다.

비참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도 과거는 얼마든지 미화할 수 있다.

이런 나라도 아름다운 책을 마지막까지 읽게 하는 게 작가의 힘일 것이다.

 

그럼 화풀이의 의미에서 단점을 꼽아 보자면.

문체가 살짝 소녀 틱 해서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시점은 주인공들 별로 계속해서 바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분위기가 비슷하다. 

 

내 지능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등장인물마다 성과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불러서 누가 누군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둘은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떨어져 있긴 하지만, 뒤쪽으로 십수 명의 학생들이 오고 있는 것이 보여 일단 가슴을 쓸어내린다.
"우리, 전체의 어디쯤에 서 있을까."
"짐작도 가지 않네."

비밀과 미래에 대한 친구들의 무책임한 희망적인 관측.

주인공 두 명은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다.

그러나 절친인 두명은 계속해서 캐물으며 눈치를 챈 친구는 계속해서 상대와 이야기하라며 등을 떠민다. ―분명 자신들 말하는 대로 하는 게 좋게 작용할거라는듯.―

학생 특유의 '누구랑 누구랑 사귄대~', '너 누구 좋아하지~' 같은 내용의 진담 반 농담 반의 얘기 어느 정도 납득하지만, 

숨기고 싶은걸 파헤치고 그게 지금은 나쁠지도 모르지만 미래에는 옳다고 여길 거라는 듯 힐난하는 친구들의 합리화하는 모습에 역겨움이 올라왔다.

 

결국 비밀을 전해 들은 절친은 숨긴 사실과 말하지 않은 서운함에 좀 삐지긴 했지만 잘 풀렸다.

물론 친구. 절친이라 부르는 만큼 상대방에 대해 잘 안다는 자부심이 있고 모든 걸 알고 공유하고 싶어 하는 학생 시절의 치기 어린 이기심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이에 안 맞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던 친구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불쾌함이었다.

전개상 비밀이 밝혀져야 했다는 건 알지만 과정이 찝찝했다.

물론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잘 읽었지만.

"시시한 풍경이구나."
도오루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시노부도 동의한다.
아무것도 없는 논에 방풍림으로 둘러싸인 주택이 간간이 흩어져 있을 뿐. 논을 가로지르듯 송전선 철탑이 점점이 이어져 있다.
확실히 풍경이
좋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평생 두 번다시 이 자리에 앉아서, 이 각도에서 이 경치를 바라보는 일은 없겠지."
시노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게. 발목 삐어서 여기 앉아 있을 일도 없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제부터 걸어온 길의 대부분도 앞으로 두 번 다시 걸을 일 없는 길. 걸을 일 없는 곳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앞으로 얼마만큼 '평생에 한 번'을 되풀이해 갈까.
대체 얼마만큼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앞으로 온다 리쿠의 책은 안 읽을 것이다.

아름다운 책, 밤공기 같은 책, 젊을 때 읽을수록 좋을 듯.

★★★★★★★★★☆

밤의 피크닉
국내도서
저자 : 온다 리쿠(Onda Riku) / 권남희역
출판 : 북폴리오 200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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