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14세기 수도원. 베일에 싸인 장서관을 중심으로 수도사들이 한 명씩 살해당한다.
역사적 배경 사이에 픽션을 끼워 넣은 장렬한 미스터리.
내가 이걸 왜 읽으려고 했을까. 오만함이 도를 넘었었다.
이 작품을 알게된 계기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철서의 우리'를 읽고 검색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철서가 이 작품의 오마쥬가 아닌가 하는 글을 읽고서였다.
교보에 검색을 해보니, 마침 '디 에센셜 시리즈' 라고 이름 붙여 새롭게 출판하고 있었고, 이 시리즈의 디자인이 기가 막히게 잘 뽑혀있었다. 양장의 묵직함과, 앞, 뒤, 정면의 금박이 붙은 디자인은 물론이고―작품에 담긴 상징을 기준으로 성경책과 같은 색인까지 만들어놨다.
이 '디 에센셜 시리즈'는 나오는 대로 구매할 운명인거같은데, 부디 제 지갑을 보호하소서―.
아무튼 철서의 우리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디자인에 눈이 멀어 클릭 한 번으로 구매해 버린 '장미의 이름'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무려 1000페이지 벽돌 책이다. 거기다 내용 또한 무지한 나에게 신학서적이라 생각할 만큼 난해해 보였다.
애초에 철서의 우리가 오마쥬 했다는 글을 봤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멍청이도 이런 멍청이가 없다. 말 그대로 하드양장본에 1000페이지라 읽는데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 무거운걸 한손으로 들고 한 손으로 바치고, 몸을 비틀고 허리를 꼬고 고개를 돌려가며 읽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알아보니 상, 하 권으로 나뉘어 몇 년 전에 출판한 판본이 있는데, 부디 편히 읽을 생각이라면 그것으로 구매하는 걸 추천한다.
이 디자인은 이미 재미있게 읽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하고 소장욕을 충족하고, 책장을 꾸밀 장식품으로 알맞지, 실용성은 조금도 없다. 챙겨 들고 다니다가 한 쪽팔이 20cm가량 늘어났다.
칭찬은 여기 까지하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있다. 바로 그말 그대로였다.
아는만큼 보여야 하는데, 아는 게 없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새까만 어둠이다. 장님 수도사가 된 기분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문제 중 하나가 되는 14세기의 교황과 황제, 수도사들 간의 대립은 조금은 이해를 했다. 그걸 시작으로 한구 한구 생겨나는 수도사들의 시체들. 그리고 수도원과 그 안에 있는 장서관을 둘러싼 알력다툼까지.
하지만 전개되는 이야기들에서―오고 가는 대화와 논쟁들에서 어려운 점이 너무나 많았다. 듣도 보도 못한 교파와, 어쩌고~회, 저쩌고~회 하는 파벌들. 계속해서 언급하는 여러 성인들과 이단들. 신학인지 철학인지 구분되지도 않는 대화. 배경이 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청빈논쟁까지.
이게 미스터리 소설인지 추리소설인지 철학서인지 신학서인지 예언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작가도 미스터리지만은 아니라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추리였고, 종교가 가미된 오컬틱한 미스터리의 무언가였는데, 이런 본격적인걸 받아버리니 고행일뿐이었다.
전부를 읽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흐리멍덩한 꿈같은 얘기가 나오면 참지 못하고 넘겨버리기도 하고, 건너 건너 읽어버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와선 그래도 상관없던 것 같이 생각되니 아이러니하다.
철서와 닮은 점을 꼽자면 닫힌 세계와 같은 한정된 배경과, 종교에 대한 장광설, 승려들끼리 수도사끼리의 치정!?, 터무니없는 동기와, 그리고 붉은 엔딩 정도일까.
가만 보면 이놈들은 청렴한 척 온갖 결백함을 두르고 있는 듯 행동하면서 아주 그냥 인간 그 자체다.
지들끼리의 치정은 말할 것도 없고, 욕망이면 욕망, 욕구면 욕구, 성욕에 권력욕에, 직급이 낮으면 내려다보고 높으면 질투하고, 선도자라는 완장을 차고 겸손을 모른다.
흑백논리를 앞세워 교리의 해석이 다르면 상대는 이단이다. 이단을 쳐 죽이는 건 신의 이름아래 행해진 성전이고, 그 안에서 자행되는 죄악은 신이 사면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종교 암흑시대가 배경이고 역사적 사실이라지만, 그만큼 권력욕들을 내비치면서도 선도자를 자처하는 게 낯부끄럽지 않았을까. 다들 죽어서 그들이 말하는 지옥탕에서 서로 마주치면 얼마나 민망할까.
그 시대에 개인이 종교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고는 하지만, 온갖 번뇌에 사로잡혀 일을 치를 거였으면, 수 십 년을 뭐 하러 세상과 단절되어 수도원에서 세월을 보내는 선택을 할까.
그래도 말싸움할 때 온갖 쌍욕이 오고 가는 상황에선 웃음이 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장까지 읽어나갔는데, 역시나 클라이맥스 부분은 전율했다. 범인과의 마지막 대결부터, 불바다를 연상케 하는 관경과 아비규환이 된 수도원. 이 장면에선 읽느라 몸이 좀 쑤시는 것도 잊고 쭉 읽어나갔다.
마무리로.
개인적인 편견으로 말하자면―폄하하자면, 이 작품은 독립영화 같았다.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노력 자료수집과 이야기의 구상, 말하고자 하는 바 까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분명 어마어마한 판매수와 명예와 찬사를 받을 만하고, 받았다.
그러나 재미있다고는 못하겠다. 중간중간 흥미롭고, 잘 읽히는 부분도 있고, 엔딩 또한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다만 그뿐.
전부 읽었을 때의 보상이 읽을 때의 노력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만의 리그처럼.
감독이 의도한 미장센도 좋다. 카메라워크도 예술이다. 잘 만들고 상도 탔는데 막상 보면 지루하고, 정적이며, 봤다는 사람이 없다.(영화를 공부하거나 파고드는 사람이라면 미장센을 포함해 다양한 장치와 숨은 의미 의도 구도들을 눈치채겠지만 보통 파헤치며 보지 않지 않는가.)
마냥 인스턴트 같은 물건을 원하는 건 아니고 단발적인 재미만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건 너무 무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