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안고-선집

 

사카구치 안고 선집

이 작품을 읽는데 아득한 시간이 걸렸다.

시간뿐만이 아니라, 읽다가 덮고 읽다가 덮고─그 반복을 하느라 이 작품에 매달려있던 일수만도 상당했다.

그 이유야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재미없다.

지루하다.

 

역시나 아주 단순한 이유다.

완독을 하기까지 상당한 끈기가 필요했다. 800페이지 가까이 되고 비싸기까지 하니, 마음 같아서는 그냥 포기하고, 덮어서 책장 구석에 밀어 넣고 잊고 싶기도 했지만 미련함에 그러지 못했다.

 

미련이 남아 그러지 못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무려 사카구치 안고의 작품이다. 문호이며 좋아하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와 함께 무뢰 파라 불리던 문호 트리오의 작품을 어찌 단편 한 두 개 읽고 재미없다며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로망과 명성으로 높아진 기대가있다.

낭만과 동경으로 다져진 바람이 있다.

 

썩어도 문호.

30편 가까이 엮어놓은 선집인데, 타율 0% 일리가 없다. 언젠가 말했듯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이 재미없을 리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바다 건너 반세기 전의 작품이 내 손에 들어올 리가 없으니까.


고향찬가

무슨 말을 나열해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안고 가 써 내려가는 심상 풍경이 전해주는 음울함 만큼은─아련함 만큼은 전해진다. 안고의 작품은 곱씹어 읽어야 한다고 첫 작품에서 느꼈다.

 

돛 그림자

무기력함이 작품 전체에 만연해 있다.

 

오만한 눈

짧은 여운을 준다.

 

여자

도입부만큼은 재미있다.

 

불가해한 실연에 대하여

진짜 '선생'의 심리는 불가해해서, 안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일본 문화 사관

난 소설을 산거다.

 

어디로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야기'자체는 재미있다.

 

타락론, 백치

사카구치 안고의 대표작인 두 작품이다. 보통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 재미없어도,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만큼은 웬만하면 재미있게 읽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타락론의 알듯 말듯한 사상과, 백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백치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전쟁과 한 여인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재미있다.

 

활짝 핀 벚나무 숲 아래

이거다. 이게 내가 바라는 '소설'이고 '이야기'였다. 에세이나  사상이 담긴 수필을 바란 게 아니었다. 잘린 목들에 역할을 주고 혼자서 노는 소꿉놀이의 광경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푸른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인

또 '이야기'가 재미있다.

 

암호

갑자기 들어오는 감동.

 

불량소년과 그리스도

아쿠타가와의 이야기와 다자이의 자살 후, 안고의 심경이 쓰여있다. 다자이의 죽음 후 내가 모르는 후일담을, 그 당시의 분위기를 엿본 기분이라 만족했다.

 

행운유수

짧고 강렬하다.

 

간장선생

기대 안 했는데, 순식간에 읽었다.

 

요나가 아가씨와 미미오

읽으면서 계속,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을 떠올렸다. 장인이 양반집에 불려 가 작품을 의뢰받고, 광기에 사로잡히는 플롯이 비슷해서 일까. 인물들의 심리도 관계성도 읽어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광인들이니 별수 있나. 선집의 마지막을 장식할만한  몰아붙이는 작품이었다.


작품들 평에서 느끼듯 이렇게 얄팍하게 읽었다.

대부분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단어를 늘여놓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듯했다. 그저 '재미있었다' '별로였다'같은 무의미한 후기를 적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다.

 

한편 통째로 의미불명인 단편도 수두룩하고, 전하고자 하는 은유나 인물들의 비유는 있는 거 같은데, 이해는 못해도 이야기로서는 재미있는 내용도 혼재했다.

 

이렇게 그린듯한 옥석혼효의 단편집은 처음이다.

작품 전반에 깔린 전쟁과 폭격, 패전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물상을 표층 정도는 느낀 듯 하지만─.

 

위대한 파괴! 파멸! 폭격! 불기둥! 타락! 불륜! 유부녀! 매음! 여체! 사랑! 여자! 육욕! 영혼의 찬가!

 

많은 단편들에서 여자와 여체 매음 뭐 이런 소재들이 한가득 한데, 이것과 이어진 주인공들의 심리는 읽을수록 불가해하다. 남자고 여자고 미쳐있고, 안고는 분명 여자와 관련해서 뭔 일이 있던 게 분명하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재미있다'라고 쓴 단편들은 대부분, 메인이 되는 여주인공의 캐릭터 성의 덕이 크니까 더욱 아이러니하다.

 

폭격을 가까이하고, 죽음이 가까이에 만연해 있다면 역시 번식 욕구가 강해지는 걸까.

 

 

이해를 위한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

이런 과거가 배경인 작품을 읽으면 나와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올라온다. 전해져 오는 암담함이 있다. 그럼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는 치열한 생생함이 담겨있으니 오묘하다.

 

안고의 작품들이 현대에 등장했다면 문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문호의 작품으로서 전해져 와 사랑받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불가해하게 느끼는 이유는 분명 가치관의 차이, 세대의 차이, 세월의 부족, 경험의 부족, 나이의 부족, 수 십 년 정도 엇갈린 시대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과거는 어쩔 수 없지만 좀 더 시간을 보내고 나서 다시 한번 읽어보면 이 정도까지 이해 못 하지는 않을 것이니,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


'활짝 핀 벚나무 숲 아래'와 '요나가 아가씨와 미미오' 두 작품은 다른 이야기들의 광기와 궤를 달리한다. 나머지가 수필의 색이 너무 강해서 그런가. 위에서 말했듯 둘 다 주인공 여자의 광기가 매력적이고, 굳이 동시대에 안 읽어도 재미있을 시대상의 공감대는 필요 없이 '이야기'로서 완성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리고 안고의 작품은 추리나 호러를 떠올리고 산건데 왠지 그런 단편은 몇 개 없어서 아리송했다.

 

★★★☆☆☆☆☆☆☆

쓰가루/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이십 엔, 놓고 꺼져/다자이 오사무

사양/다자이 오사무

나생문, 라쇼몽 단편집/아쿠타가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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